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통하여 양산된 군사력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일본군의 최종 목표는 명나라 정벌이었다. 경상도 지역은 가장 먼저 침략당한 곳이며, 고니시 유키나가 군사가 부산으로부터 상주를 거쳐 빠르게 북진하여 한성 및 평양성까지 점령하였다. 조선팔도를 8명의 장수가 분담하여 통치하는 ‘팔도분할계획’에 따라 모리 데루모토가 경상도 통치를 담당하였다. 그는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성주·개령에 진을 치고 경상도 9개 지역에 숙박소 건설을 진행하였다. 일본군의 점령방침은 「고려국금제」 및 방문(榜文) 등에 보이는 바 관대한 통치 속에서 농경에 힘쓰게 하여 군량을 확보하려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군이 자칭 수령으로 행세하며, 저항하는 관료들에 대하여는 현상금을 걸어 제거하려 하였다. 특히, 『영남적고록』을 보면, 조선의 관군은 일본군의 점령정책으로 인해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해 있었으며,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일본군과 교전, 둘째는 부역자들의 색출, 셋째는 백성들을 효유하여 관군의 휘하로 결속시키는 것 등 극복해야할 일들이 많았다. 전란 초기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일본군에 의해 경상도 여러 지역이 함락되었으나 점차 의병의 봉기와 관군의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반격하였고, 전세가 점차 역전되어갔다. 경상도 항전활동은 의령·초계 지역의 곽재우, 고령을 중심으로 기병한 김면, 합천의 정인홍, 함안의 이정 등이 활동하였다. 또한 일찍이 권응수·정세아·정대임 등이 영천성을 탈환하는 쾌거를 올렸으며, 박의장 등이 중심이 되어 경주성까지 탈환하면서 경상좌도의 요충지를 수복하였다. 일본군이 지배한 조선의 각지역은 주요 거점을 중심으로 연결된 보급로상의 일부 노선만을 지배한 것이었으므로 의병들의 활약으로 보급로가 끊기는 등 여러 난관에 봉착하였다. 한성에 집결한 일본 제장들은 군사들이 기아와 혹한에 시달려 더 이상의 진격이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조선에서의 전황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자 1593년 3월, 작전상 후퇴를 지시하였다. 그러나 단지 후퇴만 한 것이 아니라 진주성을 공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당초 목표였던 ‘명나라 정벌’이 어려워지자 ‘조선 지배’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것으로 목표를 수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본군 정책의 수정은 경상도 관·의병의 활약으로 한성 및 평양까지 이어진 보급로를 차단하였기 때문이었다.
Yun-Ho Shin (Wed,) studied this ques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