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日本兩國通漁章程」(1889년) 체결 과정은 기존 연구에서 개항기 조선외교의 ‘실책’으로 평가되어 왔다. 이는 漁稅 액수를 둘러싼 교섭이 난항을 겪으면서 조약 체결이 지연되고, 그 결과 조선 정부가 장기간에 걸쳐 대일 어세 수입을 놓쳤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인식하고 있었던 대일 어세 정책의 최우선 과제는 어세액 자체가 아니라 안정적인 징세 방식의 확립이었다. 야마다 아라지山田荒治 사건을 통해 일본 어민으로부터 직접 징세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던 외아문은, 어민을 직접 상대하지 않고 일본 측 기관을 매개로 하여 목돈 형태로 세수를 확보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구체적으로 5년 일괄 안이나 「英美漁採章程」 활용안 등이 제안된 사실이 대일 교섭에서 확인된다. 종래 일본 어민의 어업 구역확대라는 측면에서만 주목되어 왔던 「仁川暫准捕魚規則」(1888년)의 내용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재평가가 가능하다. 외아문은 「조선일본양국통어장정」 성립에 앞서 이 규칙을 통해 일본 기관을 매개로 한 목돈 어세 징수를 실행에 옮겼다. 실제로 확인되는 어세의 징수·이송 흐름은, 외아문의 장기적인 대일 징세 정책이 감리서의 역할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구상되었던 것임을 보여준다.
Hiromi Sakai (Wed,) studied this ques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