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 금산 금성면 두곡리의 옛 義城丁氏 묘역 인근에서 묘비 1기가 발견된 이후 해당 묘소의 피장자 정체를 둘러싼 논란이 일었다. 비문에 새겨진 글귀는 단지 몇 글자에 불과하지만, 그에 따르면 무덤의 피장자는 開國原從功臣 정영손과 그의 아내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해당 묘비는 조선 전기 양반 가문으로서 의성 정씨의 혼맥망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歸鄕刑’ 내지 연고지 유배형으로 불리는 고려에서 조선 전기에 이르는 ⾏刑 제도의 변화상, 入鄕處 선택의 사회적 배경은 물론 조선 전기 족보의 자녀 수록 관습 등을 검토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이 글에서 필자는 血孫만을 선별 수록하던 여말선초의 족보 기재 관행과 더불어 妻鄕·祖妻鄕 등의 연고지를 世居地로 선택하던 당대의 관습 등을 검토함으로써, 우선 정영손에게는 복수의 배우자가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즉, 묘비의 이씨는 정영손의 初配이며, 정영손의 배우자로 후대에 흔히 알려진 김씨는 繼配이다. 또한 이씨의 소생으로 추정되는 정영손의 장・차남 및 그 후손들은 外鄕인 錦山 일대에 세거하였던 반면, 의성김씨의 자녀로 생각되는 삼・사남 및 그 후손들은 주로 의성 지역에 정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론에 입각한다면 정영손 묘소의 失傳 경위, 그로인해 조선 후기 의성에 세거하던 정씨 문중에서 제단을 설치할 수밖에 없던 배경 및 금산에서 갑자기 정영손의 무덤과 묘비가 발견된 까닭 등이 어느 정도 설명된다. 정영손의 初配 금산 이씨의 가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정영손의 族人인 李之泰가 금산 이씨와 관련 있을 개연성은 있으나, 현전 자료의 빈약함으로 인해 더 이상의 논의를 진전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 한편 鄭炫을 금산의 공식적인 입향조로 간주하더라도, 금산과의 연고가 처음 맺어진 경위를 중시한다면 사실상 정영손을 실질적인 입향조로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정현의 유배지를 금산으로 결정한 사실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이러한 결정이 고려의 歸鄕刑이 여말선초를 거치면서 다양한 연고지에 付處하는 ‘연고지 유배형’으로 변화하는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Jung-Ran Lee (2026) studied this question.